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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주와 인문학

조선의 금주령은 효과 있었을까? 실록으로 본 금주 정책

by 블로그 아지트 2025. 5. 2.

조선의 금주령은 효과 있었을까? 실록으로 본 금주 정책

조선의 금주령은 효과 있었을까? 실록으로 본 금주 정책

금주령, 술을 막은 나라의 시도

조선 시대에도 술 문제는 사회적 고민거리였습니다.

 

백성들의 과도한 음주와 술로 인한 소란은 종종 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금주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정책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을까요?

 

실록 속 금주령, 반복되는 경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주령 관련 기록이 수십 건 이상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태종, 세종, 성종, 영조 등 여러 임금들이 백성들의 음주 문제를 지적하며 술을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특히 혼례나 제사 외에는 술을 빚지 말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합니다.

 

백성의 삶과 맞지 않았던 정책

문제는 술이 단순한 기호 식품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농사일을 마친 뒤의 막걸리 한 사발, 가족 행사를 위한 약주,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한 잔의 술. 백성에게 술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금주령은 현실과 어긋나는 측면이 많았습니다.

 

몰래 빚고, 몰래 마시고

금주령이 내려져도 백성들은 술을 계속 빚었습니다.

 

지방 관아에서 금주령을 지시해도, 골목 어귀와 시골 마을에서는 몰래 술이 익어갔습니다.

 

간혹 걸리면 술독을 깨뜨리거나 벌금을 물었지만, 그보다 더한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관청에서도 지키지 못한 금주령

심지어 일부 관청에서는 공적으로 금지된 술을 공사(公私) 행사에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암암리에 술이 유통되고, 일부 관리는 단속 대신 자신의 술을 챙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금주령은 선언에 가깝고, 실행은 허술했습니다.

 

금주령의 의도, 지금의 교훈

조선의 금주령은 백성을 위해 내린 정책이었지만, 시대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술은 통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음성적으로 더 퍼졌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단순한 규제보다는 문화와 생활의 맥락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는 교훈을 남깁니다.